전 세계 경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새로운 뉴스도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시장에서 자동차 판매의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뉴스는 우리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큰 뉴스입니다. 요즘 들어서 미국시장에서 거의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작년 대비 매출이 40%가량 줄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충격적인 뉴스입니다. 10%도 아니고 20%도 아니고 40%감소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니 도대체 자동차를 사치품으로 구입하는 것도 아닌데 미국 경기가 얼마나 어렵기에 차를 사야 할 사람이 이렇게 많이 차를 사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으셨는지요.
얼마 전에 맨하탄에서 닛산 자동차의 럭셔리 디비전인 인피니티의 딜러를 하고 있는 미국인과 우연히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도 얼마나 경기가 어렵기에 이렇게까지 차가 안 팔리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이 관계를 집중적으로 질문 했습니다. 경제학자의 입장이 다르고 관료의 입장이 다르듯이 밑바닥 경제를 체감하는 사람의 입장도 다를 수 있으니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차가 안팔리는 것이 은행 책임?
이 친구의 주장에 의하면 차가 안 팔리는 것은 다 금융회사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잘 아시다시피 작년부터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라는 것이 불거지면서 미국경기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 다 아실 겁니다. 미국의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면서 집값의 단 10%도 안 되는 목돈만 있으면 집을 살 수 있었고 당연히 90%이상은 대출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신용이 좋지 못한 사람조차도 비교적 싼 이자로 거액을 대출받을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서브프라임모기지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금융관행은 철저히 신용점수와 상환능력을 따져서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고 이런 선진적인 금융기법 덕분에 나중에 상환 받을 때 덜 떼이면서 금융기관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죽으나 사나 담보와 보증인에만 의존해서 돈을 빌려주는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후진적인 금융기법에 비하면 최첨단이었지만 이런 세련된 기법도 조금 더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 앞에는 속절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시보레 아베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GM대우의 모델
그런데 뜻밖에도 미국 부동산의 거품이 예상보다 빨리 붕괴되면서 부동산 가격 하락이 시작되었고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 8억 하던 집값이 떨어져서 5억이 되었는데 은행의 빚은 7억이 남아있는 (한국의 증권가의 속어로 깡통계좌가 생기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상황이 속출되었습니다. 당연히 금융기관들은 그나마도 상환 능력이 없는 개인들에게 압박을 시작하고 상환을 못하니 연체이자를 물리면서 더 대출을 못 갚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금융사들 솥뚜껑에 놀라다
그리고 불행히도 금융회사들은 차압을 해도 집을 팔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집값이 계속 떨어지는데 집을 살 사람이 없죠. 집을 팔려면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데 이런 사태는 금융기관들의 수익을 계속 잠식했습니다. 2006년 하반기 이후로 100개도 넘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업체들이 파산했고 그 중에는 미국 서브프라임업계 2위인 뉴센추리 금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미국 정부나 전문가들도 어차피 신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 돈을 빌려주는 일 자체가 고수익이었지만 고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건전하게 자산을 운용하는 보통의 금융기관에는 서브프라임사태가 더 번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미 알다시피 미국의 금융산업 전체가 폭풍을 맞은 듯 감원과 파산이 끝 모르게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융기관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습니다. 대출의 기준을 엄청나게 강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한국에서 IMF 직후에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가 된 것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은행들이 손 뚜껑만 봐도 기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신용을 가지고도 돈을 빌리기가 힘들어졌고 이자율도 호락호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이야기 서두에 미국의 금융과 부동산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집이 소비자가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상품이라면 자동차는 두 번째로 비싼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집을 살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미국인들이 현찰을 들고 가서 목돈을 지불하고 차를 사는 것이 아니고 할부를 하든가 리스를 하게 됩니다. 결국 금융회사들이 개입되지 않으면 차를 팔 수도 살수도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자동차회사들이 자신의 자회사로 금융회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일 정도고 (미국의 현대자동차 법인도 마찬가지로 금융회사를 가지고 있다.)
스즈키 포렌자, GM대우의 준중형 라세티의 미국판매 이름
기름값은 내렸는데 차는 안팔려
지난 여름 전세계를 강타한 살인적인 고유가가 이제 완전히 꺾였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갤런당 4불을 넘어가던 보통 등급의 휘발유가격이 1달러대로 내려갔습니다. 이제 자동차가 팔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기름값을 탓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국제 유가가 급락한 이유는 미국의 경기하락입니다. 미국에 물건을 팔아서 경제가 유지되는 중국, 일본, 한국 모두가 물건을 팔 수가 없게 되었고 특히 중국 산업계는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 더 이상 전 세계의 원유를 빨아들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수요가 주니 생산을 줄여도 줄여도 유가는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도 바로 올 여름만 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어쨌거나 미국에서 차가 팔리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미국의 빅 3라고 하는 GM, 포드, 크라이슬러 사정이 더 좋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마진율이 높은 대형차의 판매비중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중소형차 조차도 잘 안 팔립니다. 주로 중소형차를 찾는 사람들이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서민이다 보니 이들이 자금 사정이 이런 때 좋을 리가 없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형차에 그나마 조금 강하다는 현대 기아차도 11월 매출이 전년 동기대비 40%나 폭락했습니다.
얼마 전에 GM 대우차가 부평과 군산 공장의 가동을 중지한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말이 가동중단이지 근로자에게 임금을 주고 설비를 가동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회사입장에서 공장을 세우다니 정말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빵을 만들어 빵을 팔아야 하는 빵집 사장님이 빵이 안 팔려서 더 이상 빵을 굽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죠. 그 가게가 문을 닫기 직전이 아니면 일어나기 힘든 충격적인 일입니다. 물론 규모가 다른 자동차회사를 빵 가게에 비교해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예삿일은 아니라는 감이 오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군산공장에서는 라세티가 만들어지고 부평공장에서는 토스카와 윈스톰이 만들어집니다. GM 대우차는 한국 내수시장에서 인기가 없는 관계로 생산량의 90%나 수출하는 수출기업인데 미국에도 작년의 경우 9만대가량을 팔았습니다. 미국에서 팔리는 GM대우차로는 대표적인 것이 대우 칼로스를 이어받은 젠트라로서 미국에서는 GM의 주요 디비전인 시보레의 아베오라는 이름으로 팔립니다. 준중형 라세티는 스즈키에서 세단과 왜건은 포렌자로, 해치백은 레노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중형인 토스카의 이전 모델인 매그너스는 역시 같은 스즈키에서 베로나로 팔리다가 판매가 중단된 바 있습니다.
스즈키의 레노, 라세티의 해치백 변형모델이다
스즈키 베로나의 경우 판매량도 적었지만 주로 소형차로 구성된 스즈키의 라인업에서 형식적으로는 가장 크고 고급차로서 기함의 역할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능이 낮은 엔진, 값싼 내장재, 지나친 풍절음 등의 단점이 끊임없이 지적되며 그나마 대단하지도 않았던 스즈키의 명성을 깎아 내리는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았고 2006년 스즈키가 단종을 결정했을 때조차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구동성으로 결정이 너무 늦었다고 비아냥을 들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대우 르망을 13년간 소유한 적이 있어서 대우자동차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있는데다가 매그너스의 나름대로 유려한 스타일과 희소성을 높이 샀기 때문에 이런 혹평이 아주 불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라세티가 배지를 바꿔 단 스즈키의 포렌자와 레노는 미국 자동차 전문가들로부터 차체 공간은 넉넉하고 각종 옵션 사양도 좋은 편이나 연비가 좋지 않고 전체적인 핸들링이 너무 떨어진다는 이유로 나쁜 평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성의 차도 원하는 소비자는 항상 있게 마련이어서 작년만 해도 연간 4만대 가량 팔리며 미국 스즈키의 총판매대수의 거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제 조금 더 나은 완성도를 가졌다고 평가 받는 스즈키의 고유 준중형 모델인 SX4에게 자리를 남겨주고 단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나마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우차가 바로 칼로스에서 젠트라로 이어지는 소형차라인업입니다. 물론 한국에서 수입되는 차지만 미국 차의 배지를 달고 있다는 프리미엄이 크게 작용한 바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소비자가 미국산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 도요타 야리스나 혼다 핏 등의 경쟁자에 비해서 전체적인 완성도와 연비 등 모든 측면에서 우월하지는 않아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이 성공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소형차 시장에서 홀로 지존이었던 현대 액센트가 한 달 2000대 팔기도 버거운 요즘 시보레 아베오는 도요타 야리스나 혼다 핏에 근접한 월간 4000대에서 5000대 판매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우의 기함인 베리타스의 경우 한국의 젠트라가 미국에서 시보레 브랜드의 아베오로 수출되는 것과 반대로 GM의 자회사인 호주의 홀덴의 카프리스가 한국으로 들어와 이름을 바꾸고 판매되는 것으로 미국 시장에서 시판되고 있지 않습니다. 경차인 마티즈는 미국에 수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우의 SUV 윈스톰은 GM의 쎄타 플랫폼을 공유하는 형제차를 여럿 가지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서 팔리는 새턴의 뷰나 시보레 에퀴녹스 등이 바로 이들입니다. GM대우에서 만든 윈스톰은 유럽과 아시아시장에 홀덴이나 시보레의 배지를 달고 캡티바 등의 이름으로 수출이 되고 있지만 미국에서 수출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턴 뷰, 대우 윈스톰의 형제차
결론적으로 현재 미국에 수출되어 제 역할을 하는 것은 대우 젠트라뿐이어서 미국 시장의 자동차 시장의 불황이 현재 GM대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 보다는 전 세계적인 불황 때문에 GM브랜드를 달고 전 세계에 수출되는 대우차와 내수 자동차 판매의 감소가 현재의 자동차 공장 가동 중단의 충격적인 조치로 연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GM대우차의 지난 해 매출이 12조5천억 원이었습니다. 만약 GM대우가 도산하면 40만 명 가량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GM대우가 도산하기 전에 이미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의 직원들과 GM대우의 비정규직 직원들이 그들입니다. 이제 미국과 세계 경기의 향방에 따라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대우자동차의 팬으로서 두 번째 망하는 대우자동차를 보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픕니다.
미국 부동산의 거품과 이에 편승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여파가 우리나라 자동차 부품업체 직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정말 복잡하게 얽혀진 세계 경제의 역학관계를 보면서 이제 우리나라의 관료와 경제인들도 눈앞의 상황만을 보지 말고 외국의 경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물론 경제난의 주범이자 당사자인 미국 당국이나 월가의 분석가들도 예측 못했던 일을 우리나라 전문가들이 예측하기를 주문하는 것은 조금 과한 면이 있습니다만 두 세 수 앞을 미리 보지는 못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해결 방법을 논의하는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 사진은 에드먼즈닷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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