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생각나는 것은 이 달콤한 11월이라는 제목의 영화이다. 당시 나는 미국행을 결심하고 영어를 완전 정복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있었고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는 핑계를 가지고 할리우드 영화는 아무거나 다 보는 상황이었다. 매우 비싸고 비효율적인 공부방법임에 확실했지만 덕분에 개봉영화를 매주 몇 개씩 보러 다녔다. 그때는 왜 그렇게 영화가 다 재미있는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각 영화사의 로고를 보기만 해도 흥분이 되곤 했었다.
11월 한 달을 담은 영화
이 영화는 아마도 10월 31일 정도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Nelson Moss (키아누 리브스)는 잘 나가는 광고 회사의 젊은 중역으로 광고와 관련한 상을 휩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일을 너무 중요시 한 나머지 여자 친구와 약속을 번번히 어기고 여자 친구는 넬슨에 대해 점점 실망하게 된다. 자동차 운전 면허를 갱신하기 위해 운전면허 필기 시험을 보러 간 넬슨은 컨닝을 하다가 자신이 아닌 Sara Deever (샤를리즈 테론)를 부정 행위로 시험장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새러는 넬슨에게 시험 떨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한다. 넬슨은 청구서를 보내라고 하고 약간 무시하면서 면허 시험장을 뜨는데 아마 새러가 여기서 넬슨의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적인 면모를 보고 자신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날 밤 어떻게 알았는지 새러는 넬슨의 아파트에 찾아간다. 새러는 넬슨에게 자신이 운전면허를 못 받았으니 운전기사를 한 번 해줘야 된다고 우기고 넬슨은 억지춘향격으로 자신의 벤츠에 새러를 태우고 어느 공장 같은 곳으로 운전해 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러는 이상한 변장을 하더니 공구로 공장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잠시 후 공장의 도난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무슨 마대자루에 뭘 담아서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키아누리브스 도둑이 되다
졸지에 무슨 도둑질의 공범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어이가 없어 하는 넬슨은 새러의 재촉에 일단 차를 몰고 현장을 탈출(?)한다. 여기까지 너무 재미있는 설정이 아닌가. 더 재미있는 것은 차를 몰고 도망을 가는 가운데 새러가 자루에 든 것을 꺼내 보이려고 하니까 넬슨은 난 뭐가 있는지 보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돌리는데 도둑질한 물건이 뭔지 모르면 면책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너무 웃음이 나온다.
자루 안에 든 것은 한 마리의 강아지였고 새러는 실험 대상이었던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실험하는 곳(사실은 공장이 아닌 실험실이었는데)을 몰래 침입했던 것이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주유소에 들린 넬슨과 새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새러는 자신의 집에 까지 차를 태워준 넬슨을 차나 한잔하고 가라며 초대한다. 전혀 의도는 없었지만 반 강제로 새러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새러는 워커홀릭으로 인생을 사는 넬슨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은 바로 한 달간의 동거. 아무 조건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이 한 달을 살고 그 후는 헤어지는 것. 새러는 넬슨에게 난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며 딱 한달만 함께 살자고 한다.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제안인데 넬슨 역시 뭘 도와준다는 것인지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인지 의심을 했기 때문일까. 결국 단호히 거절을 하고 집에 돌아온다. 샤를리즈 테론 같은 미녀의 제안을 보통 남자라면 쉽게 거절을 못할 것 같은데 아마 생각 좀 해보고 연락 드릴께요. 연락처 좀 우물쭈물… 이러지 않을까.
다음날 넬슨은 자신감 혹은 자만심에 너무 차 있었는지 회사의 중요한 광고주가 자신의 광고를 폄하했다고 싸움을 걸고 계약을 놓친 것은 물론 결국 해고까지 당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집에 오니 여자친구가 절교를 선언하고 떠나가고. 넬슨은 이제 직장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는 사람이 된다. 아파트에 새러로부터 큰 선물 박스가 배달이 되고 이 박스안에는 새러가 실험실에서 훔친 강아지가 들어있었다. 화가 난 넬슨은 강아지를 돌려주러 새러네 집에 다시 오게 되고 원래 목적은 화나서 따지러 간 것이었는데 어떻게 된 것이 옷에서 강아지 소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넬슨이 옷을 벗게 되고 (사실은 새러가 세탁해준다고 벗긴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 그 저녁 이 선남선녀는 눈에 갑자기 불꽃이 튄다. 말로 들으면 정말 말이 안되는데 영화를 보면 너무 당연한 순서로 흘러가고 다 이해가 된다.
11월 한 달간의 사랑 그리고
여기서 11월 한 달의 동거가 시작되고 직장을 잃은 넬슨은 새러와 정말 꿈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을 앞둔 상황에서 넬슨은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린다. 혹시 이 영화를 찾아 볼 분을 위해 더 이상의 스토리를 공개는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인듯싶다.
이 영화는 2001년 발렌타인데이 시즌(11월이 아닌)을 겨냥해 키아누 리브즈와 샤를리즈 테론의 호화 캐스팅(?)으로 연인들을 타겟으로 만든 영화이다. 일단 개봉한 시기가 좋았고 배우가 좋았고 배경이 좋았고 (샌프란시스코의 가을, 가보지 않아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일단 멋지지 않은가) 스토리도 전형적인 멜러의 리메이크여서 철저한 기획형 계절상품이었는데 실제 개봉 성적도 나쁘지 않아서 공전의 히트작은 아니지만 첫주에 박스오피스 3위 정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평단의 평론은 비난 일색이었다. 한마디로 스토리는 말이 안 되고 연기도 부족했던 신파극이라는 것이었다. 하긴 이상한 우연도 많고 넬슨을 구원하기 위한 새러의 집착도 쉽게 납득이 되진 않으며 키아누 리브스의 멜러연기도 약간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새러역의 샤를리즈 테론은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지만 (1996년 데뷔이래 1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고 나름대로 연기력에 대한 평가도 좋았으며 그중에는 베가번스의 전설처럼 꽤 알려진 영화도 있었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고 초반에는 자유분방한 말괄량이 아가씨로, 중반이후에는 진짜 아픈가 걱정이 될 정도로 아픈 사람 연기를 잘했다. 어쩐지 언젠가 아카데미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2003년 드디어 몬스터에서 정말 같은 사람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늙은(?) 창녀연기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스위트 노벰버보다도 먼저 찍었던 사이더 하우스를 나중에 보게 되었는데 역시 이 남아공 출신의 여배우는 그 옛날의 미국 젊은 여자연기를 미국여자보다 더 잘했다. 그뿐인가.
키아누 리브스의 연기에 비판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담담하게 아픈 현실을 받아들이는 연기는 오히려 보는 사람이 더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내가 키아누 리브스를 좋아해서 그런지 시월애를 리메이크한 레이크하우스(2006)도 극장에 가서 봤는데 다시 한 번의 멜로 연기도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여자처럼 감정과 표정이 변화무쌍한 미국남자라기 보다는 다소 무뚝뚝하고 꺼벙한 한국남자 같은 느낌을 받았고 여기서 비롯된 동질감에 내가 이 배우를 편애하는지도 모르겠다.
낯익은 배역들과 만나다
제이슨 이삭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말포이네 아버지롤 나왔다)의 느끼한 transvestite 연기도 내가 충분히 느끼하게 느꼈으니까 좋은 연기였다고 봐야 될 것 같고 그렉 저먼(앨리맥빌의 리처드)도 나름대로 웃기면서도 불쌍한 역할을 잘 해주었다. 길모어걸스에 나오는 로렌 그래함도 잠깐 초반에 속옷차림으로 나오는데 조금 못생겼는데 매력이 있다 (너무 잠깐 나와서 연기력은 평하기가 좀..).
그렉 저먼의 여자친구로 잠깐 나오는 아가씨도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참 괜찮았다. 영화 보시게 되면 누군지 맞춰보시라. 게다가 샌프란시스코의 늦가을을 공원, 바닷가, 전철, 시내와 주택가를 오가면서 화면에 다 담아주는데 이건 대단한 보너스다. (보니까 낙엽은 많은데 단풍은 별로 없다. 원래 그런 건지). 샌프란시스코 한 번도 못 가봤지만 얼마나 좋은지 알 것 같다. 또 있다. 절대 빠질 수 없는 아름다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의 향연, 그중에서도 Enya의 only time과 Celeste Prince의 Wherever you are 는 너무나 조화롭게 영화를 꾸며준다. (엔야의 노래가 흐르는 새벽의 바닷가를 넬슨이 혼자 걷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시리다.)
일에 빠진 젊은 광고회사 중역이었던 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을 보면 성공하고 싶은 이 시대의 모든 젊은이가 꿈꾸는 삶을 보여주는 듯하고 (최신식의 고층 아파트에 혼자 살고, 벤츠를 몰며, 뛰어난 재능까지 있어 각종 광고 상을 휩쓰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런 대리만족에 빠져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약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비관적이 될 수도 있는데 -_-;;) 결국은 균형을 잘 잡아준다. 영화 중반 이후로 가면 인생의 행복은 사회적 성공이나 물질적인 풍요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 깨닫고 이 값진 교훈을 기꺼이 키아누 리브스에게 나누어 주는 샤를리즈 테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런 대단한 성공을 쟁취하지 못한 우리 보통사람의 삶도 사실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새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슴이 시리다
문제는 이런 류의 영화가 너무 많아서 새로움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1968년 작인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만큼 이 영화의 한계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러브스토리에서 시작한 여 주인공의 불치병에 얽힌 멜로 드라마의 스토리 라인은 너무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러브스토리를 보면서 가슴이 시린 느낌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도 같은 가슴 시림을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같은 해 가을에 개봉한 존 쿠삭과 케이트배킨세일 주연의 다른 소재의 멜로인 ‘세렌디피티’(뉴욕에서 크리스마스시즌에 일어나는 사랑의 이야기)는 ‘스위트 노벰버’의 두 배나 되는 총수익을 거두었으니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진부한 멜로 드라마보다는 새로운 이야기에 더 끌린다는 사실이 명백하지만... 하지만 영화팬인 나는 세렌디피티도 좋고 스위트노벰버도 좋았다.
자정도 넘긴 시간에 극장에서 나오면서 사람들이 별로 안 봐준 덕분에 표를 예매하지도 않은 나에게 기회가 와서 볼 수는 있었지만 좀 더 많은 연인이 이 영화를 보고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바랐다. 감사하게도 여자친구도 영화에 대한 안목이 꽤 있는 영화팬인데도 평론가 같은 입장이 아니고 나와 같은 입장에서 이 영화를 즐겨주었고 이 영화 이후에 이 두 남녀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집에 데려다 주는 내내 이야기하였다. 집에 와서는 영어공부 한다는 핑계로 아마존닷컴에 가서 이 영화 비디오를 해외주문까지 했다. 미국으로 이민 온 지금도 이 비디오를 가지고 왔는데 그때의 여자친구는 나의 아내가 되었고 나의 아내가 내가 이 비디오를 왜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모를지는 글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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