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만난 페르난데즈씨는 왼쪽 팔이 저리다고 호소하던 57세의 여자환자입니다. 직업이 보모인데 손과 팔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몇 달 전부터 왼쪽 팔과 손이 저린데다가 목까지 아프다며 검사를 받으러 왔었습니다. 제가 이번 달은 근전도 검사실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대부분의 환자가 다 이런 저림 증상을 가지고 옵니다. 검사결과 환자는 손목에서 손으로 가는 신경이 눌리는 질환인 수근관 증후군을 가지고 있었고 작업치료와 손목 보호대가 처방되었습니다. 그런데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가면서 환자가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질문을 하더군요.
“주위에서 이런 증상에는 침이 좋다던데 침을 맞아도 되나요? 의사들이 안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하도 주위에서 권하네요.”
이 질문을 받고 저는 한국에서 정말 익숙하게 많이 들어본 이런 이야기를 미국에서도 이렇게 자주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환자들에게 침술이나 한약에 대한 질문을 받는 저의 답은 약간 부정적이었습니다. 지난번 저의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저의 과거의 한의학에 대한 태도란 것이 한의학의 효능이란 것을 단지 위약효과(효과가 있다고 믿음으로서 정말 약의 효과가 나오게 되는 현상)뿐이라거나 환자에게 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침을 맞고 싶어하는 미국 환자들
그런데 미국에 오고 나서 한국에서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심심치 않게 침술의 효능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되자 제 자신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름대로 객관화된 자료를 보면서 적어도 몇몇 분야에서 침술의 효과에 대해서만큼은 허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한국의 의사들이 다 침술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의사들도 일부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 저는 주로 근골격계 질환을 보는 전공 때문인지 조금 더 침술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미국에 중의학으로서의 침술이 소개되었는가에 대한 1971년 닉슨대통령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과 수교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지의 칼럼니스트인 제임스 레스턴씨는 닉슨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사전 조율을 위한 팀의 일원으로 중국에 보내졌다가 급성 맹장염을 앓게 됩니다. 중국에서 맹장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이 되는 도중에 극심한 수술부위의 통증을 호소했고 중국의료진들은 진통제 대신 침을 시술받기를 권유합니다. 호기심으로 레스턴씨는 시술을 허락하고 침술요법으로 심했던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후에 미국에 침술을 소개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해인 1971년에 미국에 뉴욕 타임즈지에 기사로서 처음 중의학으로서의 침술이 소개된 이래로 침술은 조금씩 세력을 넓히다가 20001에 2백만명 정도의 환자가 침술로 치료를 받았는데 2002년에는 무려 8백만명이 침술 치료를 받았으며 추세로 볼 때 현재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침술치료를 받았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요즘 미국 의학계에서는 침술이 효과가 있다는 논문만큼이나 효과가 없다는 논문도 많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일부 미국의사들의 회의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침술은 그 저변을 점차 넓히고 있는 중입니다. 대표적인 근래의 사건이라면 미국 최대의 관영 보험인 Medicare가 2007년부터 침술에 대한 보험급여를 시작했고 Medicare에서 시작을 하면 다른 민간보험사들을 항상 따라갔던 추세를 보면 아마 침술의 지위는 더욱 굳건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2005년의 설문조사를 보면 59%의 미국의사들이 침술이 어느 정도 효험이 있을 거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중국 수교로 시작된 미국인들의 침술에 대한 관심
다만 제가 미국 중부에서 근무할 때는 환자로부터 침술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내과라는 전공 때문일수도 있고 중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침술이 더욱 각광받는 것은 동서해안의 대도시 주변과 아리조나, 뉴멕시코등 남부지역이고 특히 침술을 가르치는 학교들은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 미국에서 침술이 열풍이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작년 여름에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는 뉴욕 퀸즈의 한 종합병원에서 중국계 미국인 의사와 한 달간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의사는 중국계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받은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를 다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야기하다보니 퀸즈에서 개업하고 있는 한 침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용은 이 침구사가 상당히 명의로 소문이 나서 주위에 의사와 다른 침구사가 샘이 날 정도로 돈을 잘 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는 우리나라처럼 한의사라는 직업은 없지만 침을 시술하는 침구사는 각 주에서 주는 정식 면허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으며 의사들도 각주마다 다르지만 별도의 면허를 가지고 혹은 의사면허만 가지고 침을 시술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일부 주에서는 침구사가 의사와 같은 독립된 의료인으로서의 지위를 갖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한 소문난 침구사의 경우 하루에 단 3시간만 일을 하고 일인당 30분 정도를 보는데 결국 환자를 하루에 단6명만 보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일하는 의사보다 잘 벌고 있다니 시샘도 되었던 것 같고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침만으로 병을 고치는지 학문적으로도 궁금해서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저야말로 마당쇠처럼 청소라도 해주면서 기술을 어깨너머라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구자는 유연한 사고와 열린 마음을 가져야
제가 이전의 글에서 제가 과거에 가졌던 한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댓글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의사들은 한의학이 과학적인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한의학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수 천년동안 시술로서 효과가 이미 입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경험상으로 효과가 검증이 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하고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를 실험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의학을 떠나서 자연과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이지만 이 부분의 이해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은 Drshwan님의 블로그 http://drshawn.egloos.com/3578360 로 가시면 이해를 도울 만한 글이 있습니다.
과학의 진보는 우리가 잘 모르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는(사실 인문과학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남들이 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직관적으로도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 반복적인 실험과 연구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결과가 얻어지면 이 새로운 발견이 기존의 이론을 뒤집고 새로이 채택이 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새로이 채택된 이론도 나중에는 더 새로운 발견에 의해 그 자리를 내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학자로서의 열린 자세가 한국의 한의사들에게 필요하다는 요지로 지난번의 글을 썼다가 많은 댓글을 읽어보고 나서는 한의사뿐만이 아니고 의사에게도 요구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개인적인 단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 경험의 정도에 따라 각인된 정도가 다를지라도) 일부 한의사들이 경험상 효과가 있다고 하니까 검증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신의 지식체계로 설명이 어려운 그 무엇이 있다고 해서 비과학으로 치부하거나 존재 자체에 대해 비판을 하는 태도는 자신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미국에서는 의사들이 침술의 작용기전을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로 설명하기 위해 gate control theory나 endorphine theory등을 대입해보기도 하고 말초와 중추 신경계의 통증 조절 가설로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런 노력이 사실 한국의 한의학계에서 나오든지 한국에 의학계에서 먼저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의학계에서는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한국의 의사들과 세계에 드문 전통의학의 전문가인 한의사, 이 두 전문가 집단이 반목하는 동안 미국에서 이런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단지 남들하는 것 구경만 해서야 되겠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김봉한 선생의 봉한학설에 대한 연구가 남한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장차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못받고를 떠나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입니다.
불치병을 고치는 명의가 과연 있나?
그리고 한국 한의학계에 부탁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제 주위의 한의사와 의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퀸즈의 침구사 이야기도 있고 예전에 한의사 면허 없이 환자를 고쳐준 것으로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던 장병두 옹의 이야기를 비롯해서 한국에도 (면허가 있든 없든) 기존의 학계와 연관을 맺지 않고 있는 재야의 고수 한의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정보의 실시간 공유가 가능해진 요즘에 와서는 현대의학적인 치료법은 상당히 널리 평준화된 느낌입니다. 그 덕분에 서울의 환자가 뉴욕의 환자가 받을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치료를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어떤 비법을 가지고 혼자서 커다란 환자 치료의 성과를 내는 고전적인 개념의 '명의'는 단지 보다 많은 지식이 있고 환자와의 교감을 잘하는 의사정도로 의미가 축소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통의학(혹은 대체,보완의학 부문)에서는 옛날 개념의 명의에 대한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일부는 현대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하는 혹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고칠 줄 안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물론 이 중에는 상당한 사기꾼도 있다고 봅니다만 현대의학으로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효과를 직접 경험한 동료 의사의 진술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명의들은 대개 자기의 비법을 전수하고 후학을 기르는 것을 꺼린다고 합니다. 혹시 비법을 전수하면 자신의 경제적 이득이 감소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사이비이기 때문에 검증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한의학계에서 이런 것을 검증할 것은 검증하고 사기성이 있으면 제재를 하든지 정말 효과가 있다면 대학교수라도 가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배워서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 혜택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현대의학보다도 전통의학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라는 것을 한의학계에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런 국민들의 지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문제에 대해 뭔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
** 오늘의 댓글에서는 한의학에 비판적인 의사들이나 한의학을 옹호하는 한의사들 말고 반대로 한의학을 지지하는 의사나 한의학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한의사들의 글을 좀 보고 싶습니다. 지난번 글의 댓글처럼 의사 측과 한의사 측이 끝도 없이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는 모습은 이미 국민들에게 익숙한 풍경이니까요. 일반인들의 의견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
“주위에서 이런 증상에는 침이 좋다던데 침을 맞아도 되나요? 의사들이 안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하도 주위에서 권하네요.”
이 질문을 받고 저는 한국에서 정말 익숙하게 많이 들어본 이런 이야기를 미국에서도 이렇게 자주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환자들에게 침술이나 한약에 대한 질문을 받는 저의 답은 약간 부정적이었습니다. 지난번 저의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저의 과거의 한의학에 대한 태도란 것이 한의학의 효능이란 것을 단지 위약효과(효과가 있다고 믿음으로서 정말 약의 효과가 나오게 되는 현상)뿐이라거나 환자에게 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침을 맞고 싶어하는 미국 환자들
그런데 미국에 오고 나서 한국에서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심심치 않게 침술의 효능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되자 제 자신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름대로 객관화된 자료를 보면서 적어도 몇몇 분야에서 침술의 효과에 대해서만큼은 허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한국의 의사들이 다 침술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의사들도 일부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 저는 주로 근골격계 질환을 보는 전공 때문인지 조금 더 침술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침술을 받아도 되는지 물어보는 환자의 대부분은 앞서 말한 페르난데즈씨처럼 약간은 미안해하면서 물어봅니다. 마치 의사들이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 대답은 비싸지 않다면 한번 맞아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중의학에 기반한 미국에서의 침술이 상당히 객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시술자의 기술의 차이에 따른 효과의 차이가 엄존하다는 것이 많은 의사들의 의견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미국에 중의학으로서의 침술이 소개되었는가에 대한 1971년 닉슨대통령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과 수교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지의 칼럼니스트인 제임스 레스턴씨는 닉슨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사전 조율을 위한 팀의 일원으로 중국에 보내졌다가 급성 맹장염을 앓게 됩니다. 중국에서 맹장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이 되는 도중에 극심한 수술부위의 통증을 호소했고 중국의료진들은 진통제 대신 침을 시술받기를 권유합니다. 호기심으로 레스턴씨는 시술을 허락하고 침술요법으로 심했던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후에 미국에 침술을 소개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해인 1971년에 미국에 뉴욕 타임즈지에 기사로서 처음 중의학으로서의 침술이 소개된 이래로 침술은 조금씩 세력을 넓히다가 20001에 2백만명 정도의 환자가 침술로 치료를 받았는데 2002년에는 무려 8백만명이 침술 치료를 받았으며 추세로 볼 때 현재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침술치료를 받았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요즘 미국 의학계에서는 침술이 효과가 있다는 논문만큼이나 효과가 없다는 논문도 많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일부 미국의사들의 회의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침술은 그 저변을 점차 넓히고 있는 중입니다. 대표적인 근래의 사건이라면 미국 최대의 관영 보험인 Medicare가 2007년부터 침술에 대한 보험급여를 시작했고 Medicare에서 시작을 하면 다른 민간보험사들을 항상 따라갔던 추세를 보면 아마 침술의 지위는 더욱 굳건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2005년의 설문조사를 보면 59%의 미국의사들이 침술이 어느 정도 효험이 있을 거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중국 수교로 시작된 미국인들의 침술에 대한 관심
미국에 중국의 침술을 전파하는 계기가 된 닉슨의 중국 방문
다만 제가 미국 중부에서 근무할 때는 환자로부터 침술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내과라는 전공 때문일수도 있고 중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침술이 더욱 각광받는 것은 동서해안의 대도시 주변과 아리조나, 뉴멕시코등 남부지역이고 특히 침술을 가르치는 학교들은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 미국에서 침술이 열풍이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작년 여름에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는 뉴욕 퀸즈의 한 종합병원에서 중국계 미국인 의사와 한 달간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의사는 중국계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받은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를 다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야기하다보니 퀸즈에서 개업하고 있는 한 침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용은 이 침구사가 상당히 명의로 소문이 나서 주위에 의사와 다른 침구사가 샘이 날 정도로 돈을 잘 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는 우리나라처럼 한의사라는 직업은 없지만 침을 시술하는 침구사는 각 주에서 주는 정식 면허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으며 의사들도 각주마다 다르지만 별도의 면허를 가지고 혹은 의사면허만 가지고 침을 시술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일부 주에서는 침구사가 의사와 같은 독립된 의료인으로서의 지위를 갖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한 소문난 침구사의 경우 하루에 단 3시간만 일을 하고 일인당 30분 정도를 보는데 결국 환자를 하루에 단6명만 보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일하는 의사보다 잘 벌고 있다니 시샘도 되었던 것 같고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침만으로 병을 고치는지 학문적으로도 궁금해서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저야말로 마당쇠처럼 청소라도 해주면서 기술을 어깨너머라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침술이 단지 위약효과가 아니라는 반론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하는 동물에 대한 침술
연구자는 유연한 사고와 열린 마음을 가져야
제가 이전의 글에서 제가 과거에 가졌던 한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댓글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의사들은 한의학이 과학적인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한의학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수 천년동안 시술로서 효과가 이미 입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경험상으로 효과가 검증이 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하고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를 실험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의학을 떠나서 자연과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이지만 이 부분의 이해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은 Drshwan님의 블로그 http://drshawn.egloos.com/3578360 로 가시면 이해를 도울 만한 글이 있습니다.
과학의 진보는 우리가 잘 모르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는(사실 인문과학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남들이 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직관적으로도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 반복적인 실험과 연구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결과가 얻어지면 이 새로운 발견이 기존의 이론을 뒤집고 새로이 채택이 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새로이 채택된 이론도 나중에는 더 새로운 발견에 의해 그 자리를 내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학자로서의 열린 자세가 한국의 한의사들에게 필요하다는 요지로 지난번의 글을 썼다가 많은 댓글을 읽어보고 나서는 한의사뿐만이 아니고 의사에게도 요구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개인적인 단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 경험의 정도에 따라 각인된 정도가 다를지라도) 일부 한의사들이 경험상 효과가 있다고 하니까 검증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신의 지식체계로 설명이 어려운 그 무엇이 있다고 해서 비과학으로 치부하거나 존재 자체에 대해 비판을 하는 태도는 자신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미국에서는 의사들이 침술의 작용기전을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로 설명하기 위해 gate control theory나 endorphine theory등을 대입해보기도 하고 말초와 중추 신경계의 통증 조절 가설로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런 노력이 사실 한국의 한의학계에서 나오든지 한국에 의학계에서 먼저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의학계에서는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한국의 의사들과 세계에 드문 전통의학의 전문가인 한의사, 이 두 전문가 집단이 반목하는 동안 미국에서 이런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단지 남들하는 것 구경만 해서야 되겠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김봉한 선생의 봉한학설에 대한 연구가 남한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장차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못받고를 떠나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입니다.
봉한학설에 대한 SBS 뉴스 보도
불치병을 고치는 명의가 과연 있나?
그리고 한국 한의학계에 부탁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제 주위의 한의사와 의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퀸즈의 침구사 이야기도 있고 예전에 한의사 면허 없이 환자를 고쳐준 것으로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던 장병두 옹의 이야기를 비롯해서 한국에도 (면허가 있든 없든) 기존의 학계와 연관을 맺지 않고 있는 재야의 고수 한의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정보의 실시간 공유가 가능해진 요즘에 와서는 현대의학적인 치료법은 상당히 널리 평준화된 느낌입니다. 그 덕분에 서울의 환자가 뉴욕의 환자가 받을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치료를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어떤 비법을 가지고 혼자서 커다란 환자 치료의 성과를 내는 고전적인 개념의 '명의'는 단지 보다 많은 지식이 있고 환자와의 교감을 잘하는 의사정도로 의미가 축소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통의학(혹은 대체,보완의학 부문)에서는 옛날 개념의 명의에 대한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일부는 현대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하는 혹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고칠 줄 안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물론 이 중에는 상당한 사기꾼도 있다고 봅니다만 현대의학으로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효과를 직접 경험한 동료 의사의 진술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명의들은 대개 자기의 비법을 전수하고 후학을 기르는 것을 꺼린다고 합니다. 혹시 비법을 전수하면 자신의 경제적 이득이 감소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사이비이기 때문에 검증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한의학계에서 이런 것을 검증할 것은 검증하고 사기성이 있으면 제재를 하든지 정말 효과가 있다면 대학교수라도 가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배워서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 혜택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현대의학보다도 전통의학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라는 것을 한의학계에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런 국민들의 지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문제에 대해 뭔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
** 오늘의 댓글에서는 한의학에 비판적인 의사들이나 한의학을 옹호하는 한의사들 말고 반대로 한의학을 지지하는 의사나 한의학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한의사들의 글을 좀 보고 싶습니다. 지난번 글의 댓글처럼 의사 측과 한의사 측이 끝도 없이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는 모습은 이미 국민들에게 익숙한 풍경이니까요. 일반인들의 의견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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