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등학교 때쯤으로 기억합니다만 TV에 미국에서 오신 이상구 박사라는 분께서 한국인의 건강에 대해 강연을 방송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에 마치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공자 강의했던 것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서 건강에 관해 강의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건강에 관한 대중의 관심에 비해서 공중파에서 오락성이 별로 없는 건강에 관한 강의(비타민 같은 프로그램 말고)에 시간을 그렇게 내어준 자체가 참 신기합니다.
이상구 박사의 건강법에 대한 추억
그런데 의외로 이 프로그램이 상당히 인기를 끌어서 당시에 이상구 박사의 건강법에 관한 신드롬이 일어났는데 건강법의 핵심은-지금 확실히 기억나는 것으로는-육식보다는 채식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으신 우리 어머니께서도 채식이 몸이 좋다며 안그래도 채식이 너무 많아 불만인 상황에서 더욱더 채식위주로 식단을 바꾸시는 바람에 안 그래도 단백질 부족으로 허덕이던(?)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이 불만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후에 국내의 의사들 사이에서 이상구 박사의 건강법에 대해 반론이 일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의사가 히트를 치니까 국내 의사들이 시기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인은 당시만 해도 아직도 육식 섭취가 더 필요하며 채식만이 건강식이라기보다는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더 건강에 좋다는 것이 국내 의사들의 반론의 요지였습니다.
사람이 채소만 먹고 살 수 있나
인간이 잡식동물이라는 것은 단지 인간의 식습관이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동식물성 영양분을 다 섭취해야만 정상적인 대사가 이루어지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지어져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채식주의자는 채식만 해도 잘 사는데 왜 육식이 반드시 필요 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채식주의자도 사실 꽤 많은 세분화가 가능한데 그냥 의학적으로는 비건(vegan)과 베지테리언(vegetarian)정도로만 분류를 하는 것 같습니다. 분류가 복잡하니까 vegan은 철저하게 채식만 하는 사람으로 하고 vegetarian은 채식에 더해서 우유와 계란은 먹는 사람으로 하겠습니다.
위에서 인간은 육식과 채식을 다 하도록 생물학적으로 타고 났다고 했는데 그럼 완전한 채식만 하는 vegan들은 동물성 식품을 전혀 섭취하지 않고도 괜찮을까요. 이론적으로는 물론 괜찮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채식주의자들의 식단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3대 영양소는 물론 대부분의 비타민이나 미량 원소 섭취 등에서 문제가 없습니다. 위에서 ‘대부분의 비타민’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비타민 중에 뭔가가 섭취가 문제가 생기는 것을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야채와 과일이야말로 비타민의 보고인데 채식만 한다고 해서 비타민 섭취에 문제가 생기다니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듯 합니다.)
채식만 하는 경우 문제가 생기는 대표적인 영양 결핍은 바로 비타민 B군 중에서 비타민 B12(cobalamin)입니다. 이 비타민은 야채나 과일로 거의 섭취하기가 힘들고 주로 동물의 간, 우유, 조개류 등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요즘은 미국 식품회사 들에서 시리얼이나 에너지바(미국에서 파는 아침식사 대용 식품), 두유 등에 인공적으로 첨가를 많이 해줍니다만 미국의 경우 vegan이라면 비타민 B12 알약을 먹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간혹 비타민 B12알약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vegan인 경우도 건강상의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을 보는데 이들은 아마 위에서 말씀드린 가공식품에 첨가된 비타민 B12를 잘 섭취하는 사람이거나 몸속에(간에 대개 수년치가 저장되어 있으므로) vegan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축적되어 있던 비타민을 사용하기 때문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시 이상구 박사의 건강법으로 돌아가서 제가 한국 의사들의 반론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당시 한국인들의 육류 섭취가 아직 부족하다는 설명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구 박사의 건강법이 또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활수준이 나아질수록 육식이 어차피 증가하고 이에 따른 각종 질환도 느는 것이 당시에도 이미 증명이 어느 정도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채식위주의 식사가 건강상의 큰 손해가 없다는 측면에서 육식을 최대한 절제하는 것이 더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미리 국민들을 계몽했었던 것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채식이 건강과 자연 보호에 좋은 이유
그때까지만 해도 채식은 좀 부실한 식사고 육식을 해야 뭔가 제대로 된 식사라고 생각했고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채식이 정말 건강식이라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채식 위주의 식사를 했던 한국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주부에게 채식이 정말 좋은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해준 방송 프로그램이었다고나 할까요.
육식의 증가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관념론이 아니고 의학 통계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현재 한국인에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유방암이나 대장암만 보더라도 육식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게다가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이라는 학술지에 1999년에 발표된 한 논문(Mortality in vegetarians and nonvegetarians: detailed findings from a collaborative analysis of 5 prospective studies)에 따르면 생선 위주의 식사를 하는 사람이 가장 장수하고, 채식주의자가 그 다음이며, 육식을 가끔 먹는 사람이 세 번째고 자주 육식을 먹는 사람이 가장 빨리 죽는 것으로 나온 적도 있습니다. 생선을 많이 먹는 것이 왜 장수의 비결인지는 지면서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예전에 한국에서 가장 영양가 없는 식단으로 취급받았던 채식이 장수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임이 틀림없습니다.
좁은 사육장에서 길러지는 닭들
또한 채식주의자들이 섭취하는 곡물의 10배가 가축 사육에 쓰이는데 미국 한 나라에서 매년 가축사육에 쓰이는 곡물만 가지고도 8억 명의 인구를 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 광우병 파동 덕분에 미국의 비인도적인 가축 사육 공장(?)의 실태에 대해보고 경악하신 분 많을 겁니다. 광우병도 그렇고 조류독감도 그렇고 얼마 전에는 돼지에서 생기는 구제역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던 것도 그렇고 요즘처럼 고기 먹기가 편치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채식 조금만 더 합시다
물론 고기의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적어도 제 의지로는-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제는 채식을 하는 것이 충분히 도덕적으로나, 그리고 건강학 적으로 우위를 확보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적인 채식은 못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우리네 식생활을 1970-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채식을 많이 하는 식생활로 바꿔보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이전에 우리 어머님들께서 가족의 건강을 위해 채식 신드롬에 동참하신 것처럼 이제는 블로거들이 환경과 건강을 위해서 채식 더 많이 하기 운동이라도 벌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에 대한 오해와 진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미로운 새로운 암 치료법들 (46) | 2008.06.16 |
---|---|
굶어도 살이 빠지지 않는 진짜 이유 (91) | 2008.05.27 |
조류독감, 새똥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 (18) | 2008.05.16 |
내가 인간 광우병에 걸렸는지 모르는 이유 (92) | 2008.04.21 |
침대, 단단해야 하나 푹신해야 하나? (25) | 2008.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