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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는 영어말고 이해하는 영어

영어로 소처럼 열심히 일한다는 뭐라고 할까?

얼마 전에 방송인 이다도시씨가 이혼을 준비 중이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에 거주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프랑스 여성이 되었던 그녀의 이혼 관련 소식은 남의 일인 줄 알면서도 저의 마음을 어쩐지 무겁게 했습니다.

이다도시씨가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이다도시씨가 92년에 한국에 와서 연세대 한국어 학당을 다녔고 그 다음 해에 현재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고 하니까 지난 17년 동안 거의 매일 한국어를 쓰면서 살았을 것이니 한국어를 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한국인이 유럽계의 언어를 배우기가 힘든 것처럼 유럽인들도 한국어가 배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정말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다도시씨 외에도 한국에서 인기있는 외국 출신의 방송인으로 하일씨, 이한우씨 등의 방송인이생각나는데 하나같이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분들입니다. 사실 방송계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면 언어는 기본인 것 같습니다. 김윤진씨의 연기력도 조혜련씨의 유머도 유창한 영어와 일본어가 있었기에 더욱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외국 출신 방송인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힘들게 말을 하나 하나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유창하게 막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특히 제가 이 분들이 한국말을 잘한다고 느꼈던 것은 한국의 관용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한국말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외국인이 ‘누구나 다 안다.’라거나 ‘이야기가 빗나갔다.’ 라고 하지 않고 ‘삼척동자도 다 안다.’ 혹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라고 한다면 듣는 한국 사람들의 눈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외국인이 한국말 관용구를 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도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호기심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sitting on the fence

source; flickr.com

그런데 이런 현상이 외국말을 배우는 한국인과 외국인과의 대화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몇 년 전에 한 주간지를 보다가 한국의 저명한 외교관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이 분이 유엔에서 일하실 때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코멘트를 요구받고는 ‘we are sitting on the fence.’라는 관용구를 사용해서 지금 우리는 사태의 추이를 관망 중이고 섣불리 의견을 말할 수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미국의 외교관이 확실히 미국을 지지해 주지 않으니까 말의 내용은 별로 마음에 안드는데 영어를 참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는 한국인이 이런 관용구를 쓰는 것이 대단히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도 일상 생활에서 관용구 몇 마디를 쓰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오해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최근에 미국인 동료의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 날 일이 워낙 힘들었던지라 ‘I was working like a dog.’이라고 하니까 닥터 고는 정말 영어를 잘하는구나 하고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를 잘한다는 기준이 평소에 조리있게 말을 잘한다 이런 것이 아니고 단지 관용구 한마디 했을 뿐인데 이런 것으로 사람을 쉽게도 평가해주는지라 좀 얼떨떨했지만 생각해보면 외국인이 한국말을 하면서 ‘소처럼 열심히 일했다.’라고 한다면 듣는 한국 사람 반응이 어떨까 생각해보면 제 동료의 반응도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외국인들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관용구를 쓰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하는데 관용구중에는 자칫 예의 없는 표현도 있으니까 조심해서 쓰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관용구를 공부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외우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 표현 자체가 그 말이 만들어진 나라의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문화를 잘 알기 전까지는 그 표현이 왜 생겼는지 납득이 가지 않고 그래서 무작정 외우기가 꽤 힘이 듭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 관용구와 뜻, 그리고 예문이 나온 정도가 전부인 경우가 많아서 외워지지가 않으니 실제 관용구를 익숙하게 구사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용구에 담긴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대개는 영어 관련 서적에서 기원을 찾았거나 원어민에게 물어본 것이지만 제가 나름대로 기억을 돕기 위해 생각해낸 것도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Work like a dog

일단 말이 나온 김에 ‘work like a dog’을 해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도 사실은 이 말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논농사, 밭농사를 다 소가 하니까 소처럼 일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개는 일을 하지 않는 동물입니다 (도둑을 지키는 것은 제외). 그런데 왜 영어에서는 개처럼 일을 한다는 말이 일을 열심히 한다는 말이 되었을까요? 일단 미국이나 뉴질랜드에서 소를 키우는 목가적인 풍경을 상상해 보면 소가 일을 하는 동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서양의 농경사회에도 영화를 보면 한국에서 소가 하던 일을 서양은 노새나 말이 하더군요. 그런데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나 플란더스의 개를 보면 개가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개는 양떼를 모는 목동의 친구로서 양떼를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 다니며 양떼를 몹니다. 그리고 개가 우유통이 든 수레를 끌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한국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개가 상팔자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개처럼 일한다가 한국말의 소처럼 일한다와 같은 의미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A feather in one’s cap

얼마 전에 미국의 자동차 관련 웹사이트에서 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현대 제네시스가 미국 The National Highway Traffic Safety Administration (NHTSA) 주관의 자동차 충돌 테스트에서 최고 점수를 맞았다는 소식이 알려진 날이었는데, 한 미국 네티즌이 댓글에 이렇게 쓴 것을 보았습니다. ‘One more feather in Hyundai's cap - this is fantastic!!’ 뜻은 ‘현대가 또 한건 했구나. 대단하다.’ 이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a feather in one’s cap’을 응용한 표현인데 이 자체는 무슨 자랑거리나 업적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전에 유럽과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투르크가 패권을 놓고 싸울 때 헝가리에서는 자신이 죽인 터키인의 수만큼 모자에 깃털을 꽂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자에 깃털이라는 것은 빛나는 전과를 뜻하는 것이 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좀 살벌하긴 하지만 이렇게 들으면 나중에 기억은 잘 날 것 같습니다. If you receive this award, it would be a feather in your cap. 이런 식으로 말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Let the cat out of the bag

let the cat out of the bag을 사용한 한 신문기사

let the cat out of the bag을 사용한 한 신문기사

뉴스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관용구입니다. 직역하면 ‘고양이를 주머니 밖에 내다’가 되겠는데 뜻은 ‘비밀을 누설하다.’의 뜻입니다. 옆 뉴스의 일부를 보면 미국의 한 방송사에서 올 봄에 방영될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내용을 누설했다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만들어진 것은 중세 유럽의 비양심적인 상인들에서부터라고 합니다. 상인들이 자루 안에 새끼 돼지를 담아서 팔았는데 간혹 사는 사람들에게 자루를 집에 갈 때까지 열어보지 말라고 하면서 뭔가 자루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동물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은 어이없게도 가치가 없는 고양이인 경우가 있어서 만일 자루가 열려서 안의 동물이 새끼 돼지가 아니고 고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중요한 사업 상의 비밀이 폭로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발음이 조금 불연속적이어서 발음이 쉽지 않은 데 ‘렛더캐라러더백’ 이런 식으로 연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원어민의 발음을 듣고 반복해서 연습하시면 비밀이 누설되었다는 의미로 종종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문은 위에 뉴스 기사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Get down to brass tacks

source; livingstonbuzz.com

저는 청동, 황동의 개념을 중학교 산업기술 시간에 처음 배웠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청동(bronze)은 구리(copper)와 주석(tin)의 합금으로 국사와 세계사에서 청동기시대라고 하는 대목과 미술에서 조각을 배울 때 브론즈라는 작품 장르를 배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황동(brass)은 우리말로는 놋쇠라고도 하는데 구리와 아연(zinc)의 합금인데 주로 음악 시간에 금관악기(brass)와 목관악기(woodwind)에서 배운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brass tack은 놋쇠못이 되겠습니다. Get down은 말이나 차에서 내리다는 뜻이지만 get down to 가 되면 무엇무엇에 착수하다, 돌아가다, 들어가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놋쇠못으로 돌아가자는 무슨 말일까요?

upholstery하는 장면

upholstery하는 장면 (사진 출처 불명)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직업을 잠깐 소개를 드려야 합니다. 저도 한국에서는 못 들어본 직종인데 미국에 오니 upholstery라는 직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을 upholster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직업이냐면 의자 같은 것을 보면 쿠션이 없는 나무나 쇠의자등은 엉덩이가 아프니까 앉는 부분에 두꺼운 천이나 스폰지를 덧대어 보기도 좋고 쿠션도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서양에는 전통적으로 의자를 만드는 직업과는 별개로 이렇게 천을 덧대는 일만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의자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소파도 작업을 하고, 중세 유럽의 호화로운 성을 보면 벽까지도 비단 비슷한 번쩍이는 옷감으로 다 두껍게 덧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일까지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상당히 성업중인 비즈니스로 자리잡은 계기는 아무래도 가죽소파나 가죽의자보다도 천소파, 천의자를 많이 쓰는 미국의 일반 가정의 전통과 관계가 있습니다.

저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거의 절대적으로 가죽소파를 좋아하는 한국과는 달리 따뜻한 질감 때문인지 부유층에서 조차도 미국은 천소파가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그대신 천소파는 때를 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천을 갈아주어야 하는데 upholtery를 하는 사람들이 이런 일로 먹고 삽니다. 그런데 천의자든 소파든 작업을 하려면 이 천을 의자에 박은 놋쇠못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brass tack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에서 get down to brass tacks라는 말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뜻은 ‘본론으로 들어가다.’ 혹은 ‘핵심적인(기본적인) 용건 혹은 사실을 논의하기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라고 하려면 그냥 let’s get down to brass tacks라고 하면 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brass tack이 하나가 아닐 테니 tacks라고 복수형을 써야 하겠습니다.

Blow your own trumpet

‘자기 자신의 트럼펫을 불다.’라고 해석이 되니까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자화자찬하다.’라는 의미를 바로 파악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뜻은 이런데 왜 이런 말이 만들어졌는지 학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약성경까지도 올라가서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 마태복음에 보면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Therefore when thou doest [thine] alms, do not sound a trumpet before thee, as the hypocrites do in the synagogues and in the streets, that they may have glory of men. Verily I say unto you, They have their reward.

그러므로 구제(救濟)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者)가 사람에게 영광(榮光)을 얻으려고 회당(會堂)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自己)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많이 들어봤음한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는 대목의 바로 앞 구절의 말씀입니다. 즉 구제를 행하려거든 하고 나서 스스로 동네방네 나팔불면서 떠들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다 보니 갑자기 문근영씨의 선행이 생각나기도 하고 김장훈씨도 떠 올려집니다. 어쨌거나 착한 일을 하려거든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겸손의 충고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누군가 ‘He is always blowing his trumpet.’이라고 하면 ‘그 녀석은 언제나 자기 자랑에 정신이 없어.’라는 의미로 알아 들어야지 ‘그는 언제나 트럼펫 부는 연습을 열심히 한다.’로 알아들으시면 곤란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라면 ‘He is eager in his trumpet practice.’정도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trumpet대신 horn을 써도 같은 뜻입니다.

Bury the hatchet

영화 미션의 포스터

영화 미션의 포스터

로버트 드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스를 생각하면 반드시 생각나는 영화가 바로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에 빛나는 롤랑 조페 감독의 1986년작 ‘미션’(the mission)입니다. 영화도 유명하지만 Gabriel’s Oboe로 잘 알려진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줍니다. 우리에게 예수회라고 알려진 카톨릭의 조직인 society of jesus의 멤버들은 jesuits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신대륙에서 원주민을 교화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 파송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유럽의 신대륙 진출 초기에는 종교가 지배정책의 도구로 전락한 나머지 얼마나 타락했는지 코르테즈가 아즈텍을 공격할 때 정복군을 따라나섰던 신부는 금을 세기에 급급해 세례를 원했던 아즈텍의 죽어가는 황제 목떼수마에게 세례조차 주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잘 알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예수회의 신부들은 원주민들에 대한 입장이 당시 유럽인의 일반적인 사고 혹은 교황청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원주민을 야만인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대하고 다가가려는 노력을 보였고 본국 정부와의 충돌을 무릅쓰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원주민들의 권익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보면 결국은 이들 신부들은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식민 정책의 충돌로 인해서 원주민들과 함께 식민지에서도 학살을 당하고 나중에는 스페인에서도 축출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슬픈 역사가 생각나는 이유는 지금 말할 bury the hatchet의 기원이 바로 예수회 신부의 연례보고서로서 짧게 줄여 Jesuit Relations 라고 더 흔히 불리우는 The Relations des Jésuites de la Nouvelle-France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뉴프랑스 지방은 북미의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록키산맥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이 이 곳의 인디언들의 풍습을 적은 보고서 중에 싸우던 두 부족이 화해를 할 때는 평화 조약의 증거로서 서로의 도끼를 땅에 묻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싸우던 두 나라나 정파가 화해했다는 말을 하면서 이 표현을 많이 쓰고 뉴스나 신문에서도 현재까지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오늘 제 글 읽느라 공부 열심히 하셨으니 마지막 보너스로 가슴을 울리는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들어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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