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와서 1년 반은 한국사람이고 미국사람이고 천사 같은 사람들만 만났습니다. 그 때는 제가 특별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미국이란 곳이 하도 넓고 뭐든지 풍부하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도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인트루이스라는 중부의 도시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아주 나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알아버렸다고나 할까요?
이 경험이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얼마 전에 티스토리에서 저를 인터뷰하면서 ‘미국에 살면서 있었던 황당했거나 재미있는 경험’을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는 이번 주 금요일 올라옵니다.) 재미라면 그냥 하루 하루 아무 큰일 없이 잘 지나가는 것이 재미라서(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라고 하지요. ^^;;)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데 황당한 경험은 세인트루이스에서 뉴욕으로 옮기는 사이에 다 일어났었습니다.
이미 집을 샀다가 팔면서 거액(?)을 손해 본 이야기도 했고, DMV(자동차 등록과 면허에 관할하는 관청)에 자동차 등록하러 가면서 일이 한 번에 안되어 9번이나 헛걸음한 이야기나 뉴욕에서 자동차를 도난 당했던 이야기도 했는데 이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던 제 이사(moving)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공교롭게 지금이 제가 사는 건물에는 연중 최대의 이사철입니다. 미국은 학교들이 6월말에서 8월말까지 긴 여름 방학에 들어가고 9월부터 신학기가 시작됩니다. 미국 병원은 의사들에게 방학이 따로 없으므로 6월에 의대생들이 졸업하고 나면 바로 7월부터 인턴, 레지던트의 수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6월말에서 7월초에 이르는 2주 정도의 기간이 미국 수련의들에게는 가장 바쁘게 이사 다니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제가 내과를 하던 도중에 재활의학과로 전공을 바꾸었기 때문에 이 공식적인 시기에 이사를 한 것이 아니고 1월초에 뉴욕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다음은 이 엄동설한에 이사를 오면서 고생한 이야기입니다.
그 해 겨울은 추웠다네
그 해 겨울에 뉴욕에 자리를 잡기로 이야기가 되고 나서 당장 이삿짐 운송업체를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한국처럼 아파트마다 flyer(찌라시, 광고전단)을 돌리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사업체도(moving company) 전화번호부나 인터넷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업체를 찾으면서 굳이 세인트루이스 지역업체를 찾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미국의 경우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타 주로의 이사는 전국단위의 네트워크를 가진 회사를 고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트럭렌탈업체, budget
인터넷으로 검색에서 웹사이트가 잘 되어있는 꽤 규모가 있어 보이는 회사를 하나 고르고 전화를 했습니다. 목소리로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전화를 받은 데이빗이라는 젊은 친구는 적어도 목소리로는 일단 아주 친절했고 믿을만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이사에 얼마나 돈이 드는가 였는데 데이빗은 전화상으로 식탁의 수, 의자의 개수, 각각의 가구의 크기를 다 따져 물으면서 대략의 견적을 내주었습니다. 가격은 예상보다 높았던 2000불 정도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싼 것이 비지떡일지 모른다 이왕이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저는 이 업체를 선정하기로 단박에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날짜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연말연초에 이사를 해야 하는지라 성탄절과 새해 연휴 때문에 운송 날짜를 잡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밀고 당기기를 한 끝에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일요일로 날을 잡았습니다. 제 상식으로 미국인들은 일요일에는 절대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쨌거나 이사날짜를 절박하게 받아야 했던 저에게는 그래도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신용카드로 700불 정도를 선금으로 지불하고 계약을 마쳤습니다. 그 후에 계약서가 정식으로 왔고 모든 서류작업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한결 마음을 놓게 되었고 이사 하루 전인 토요일은 마눌님께 대충 짐을 싸 놓으라고 당부하고 새벽에 근무를 위해 병원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침 7시경 회진 중인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이삿짐 업체 직원인데 짐을 가지러 지금 집 앞에 와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근무 중에 하도 황당한 전화라 얼떨떨했습니다.
이사를 당장 해야한다는 협박
이사는 분명히 내일인데 왜 하루 전에, 아침부터 와서 이 난리들인가 하고 말이죠. 그래서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이사는 내일이다 라고 했지만 지금 짐 못 실으면 이제 자기들은 테네시로 떠날 것이고 그럼 이사는 없다 라는 말로 협박(?)을 했습니다. 원래 이야기를 데이빗과 했으므로 이 친구와 통화하고 싶었지만 토요일에다가 이른 아침이라 이 친구는 연락도 되지 않았고 그 때 당장 뭔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어차피 이사할 것이었지만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집에게 작별인사도 못했고(-_-;;) 마음의 준비도 하나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도 마눌님이 혼자 집에 계신데 어떻게 도대체 이사가 될까 걱정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를 하루 당기기로 했습니다.
당장 짐을 내갈 사람들이 왔으니 문을 열어주라는 청천벽력 같은 제 전화에 마눌님도 충격을 먹으셨고 저 자신도 걱정이 아주 심한 상태였습니다. 마눌님은 어찌 일을 그렇게 해서 이런 사태가 생기게 하느냐고 죄도 없는 저를 원망했지만 어차피 오늘 아니면 연휴가 다 끝나는 1월 중순까지 이사를 못한다니 1월 초부터 뉴욕의 새 근무지에서 일을 시작하려면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바쁜 24시간 근무를 하느라고 집에서 이사가 어떻게 되는지도 확인할 겨를이 없이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나마 아주 다행인 일은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나서(정확히는 제가 이 일을 어쩌면 좋냐고 떠벌려서) 이사를 돕기 위해 집에 와주었습니다.
책상이 다 부서진 이유는? 본문 참고
이웃 친구들은 하루 종일 짐 싸는 것도 도와주고, 아가와도 놀아주고, 필요한 것도 사다 주면서 이사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이삿짐업체 일꾼들이 얼마나 아마추어였는지 이사에 필요한 테이프나 가구를 분해하는 공구도 없이 와서는 나중에 우리 마눌님에게 조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는 우리 마눌님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고 사이즈로 맞지 않는 문으로 책장과 책상을 가지고 나가려고 낑낑대다가 가구를 거의 반파를 시켜서 참다 못한 마눌님이 드라이버 등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마눌님과 한국인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 사람들은 전혀 이사 짐을 싸거나 운반해본 경험이 없는 듯 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토요일 날 인력시장 같은 데서 급하게 뜨내기들을 수배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가지고 온 트럭도 어이가 없게도 회사 트럭도 아니고 펜스키라는 트럭 렌탈업체에서 빌린 것이어서 나와 계약한 업체가 이 업체가 맞을까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급조된 이삿짐업체?
이사가 끝나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특히 책상은 조립했는데도 네 다리로 서지 못할 정도로 부서졌고, 책장은 간신히 세웠지만 하도 흔들거려서 오늘 내일 하면서 무너질 날 까지 쓰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가지 화가 나는 것은 이 이사가 한국으로 말하면 포장이사라서 돈도 더 많이 내었고 분해, 짐 싸기, 운반, 짐 풀기, 가구배치, 조립까지 다 해주기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해는 파손으로 저절로 되었고, 짐은 마눌님과 친구들이 다 쌌고, 짐 풀기는 제가 다 했고, 가구배치는 부서진 잔해를 방으로 옮겨주기만 했고 조립은 제가 거의 다 했습니다.
어쨌거나 짐을 실어 보내고 다음 날 저녁은 세인트루이스를 떠나는 우리 가족을 보내는 의미로 지인의 저녁에 초대되어 갔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8시경에 이 이삿짐업체에서 뜬금없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가 이삿짐 운송비 4000불에서 계약금 700불만 내고 나머지를 주지 않았으므로 당장 돈을 내놓지 않으면 제 짐을 다 경매에 붙여버리겠다는 황당한 전화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는지 말문이 막혀서 대답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짐을 실어갈 때 잔금을 요구하지 않아서 돈은 이사가 끝나고 나서 내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경매를 운운한 것도 그렇고 운송비가 2000불로 알고 있었는데 금새 두 배가 되어 버린 것도 그렇고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곧 붕괴의 위험에 처한 책장
저는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상대방(아마 제가 원래 계약한 업체에서 하청을 준 중소업자로 생각이 됩니다.)에게 돈을 줄 테니까 걱정 말아라, 그대신 운송비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 물었지만 짐이 많으니 그렇다는데 할말이 없었습니다. 경매 이야기는 분명 협박 같았지만 어차피 줄 돈이면 그냥 주어버려도 문제는 없을 듯해서 신용카드로 잔액을 다 지불해 주었습니다. 기분은 상당히 나빴지요. 어떻게 예의 없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지 지금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제 짐도 다 부쳤고 빈집에서 더 머무를 이유도 없었기에 월요일은 새로운 터전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출발은 했지만 사실 아직 이사 갈 집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뉴욕 병원의 직원 아파트를 예약은 했지만 아직 비어있는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예 집이 비지 않으면 그냥 렌트라도 얻으면 되는데 문제는 담당자와 통화를 하지 못하고 매번 옆자리에서 다른 업무를 보는 사람이 대신 전화를 받아주어서 집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뉴욕까지 1박 2일 동안 운전하면서 수시로 직원 아파트 담당에게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남겼으나 결국 담당자와 통화를 할 수 없어서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삿짐을 보낼 때는 받는 주소는 잠정적으로 병원 직원 아파트로 했지만 당장 이사하기는 틀렸고 짐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어디에든 보관해야만 했습니다.
럭셔리 호텔로 들어가다
저는 이삿짐업체에 전화해서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짐을 창고에 보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 예의 없는 하청업체 사장은 순순히 ‘돈만 내면 다 가능하다.’하면서 일단 2주간 보관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2주 후로 짐의 배달을 일단 미루고 이젠 직원 아파트가 날지 안 날지 확인을 할 때까지 살 곳이 필요해서 뉴욕시에서 조지워싱턴 다리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뉴저지의 포트 리의 힐튼 호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원래 특급 호텔에 묵을 금전적 여유도 없었는데 병원이 위치한 브롱스는 워낙 위험한 곳이라는 설에 브롱스의 숙소에 식구들을 놓고 출근할 수가 없었고, 그나마 이 지역에는 쓸만한 호텔도 아예 없었으며, 맨하탄은 더 비쌌기에 뉴저지에 숙소를 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인터넷 사이트의 역경매를 이용해서 원래 가격의 60% 정도의 가격에 방을 구해서 일주일을 지내면서 돈을 수백 불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 주 병원에 출근하면서 드디어 신년휴가에서 돌아온 직원 아파트 담당자를 만나게 되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행히 1월 셋째 주부터는 방이 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당장 계약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큰 일은 호텔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를 먹이는 일이 있는데 이 식성 까다로운 녀석은 엄마가 해 준 것이 아니면 절대 안 먹는지라 1주가 지나고 입주까지는 부엌이 딸린 레지던스호텔로 옮겨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레지던트호텔은 포트 리에서 한참 남쪽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매일 왕복 3-4시간을 운전하며 병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이제 이사 갈 집이 정해졌기에 이삿짐업체에 전화를 걸어서 제가 집에 입주하는 날짜에 맞추어 짐을 배달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못된 사장은 다시 한번 사람을 열 받게 했습니다. 그 날짜에 맞춰서 운반해줄 차가 없으니 제가 원하는 날짜로부터 일주일 더 있다가 배달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이삿짐을 보관해달라고 할 때부터 집이 언제 날지는 확실히 는 몰랐지만 그래도 2주 보관을 요청한 상태여서 당연히 2주 후에는 배달이 가능한 것으로 알았는데 무려 일주일이나 기다리면서 호텔에서 4시간짜리 출퇴근을 해야 한다니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요. 사실 돈도 다 지불한 상태라 협상력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배째 사장에게 ‘내가 호텔 비라도 청구하랴’ 하면서 전화로 어르고 싸우면서 가까스로 이틀 더 일찍 배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드디어 산전수전 다 겪은 이삿짐이 도착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 전날 이사 갈 집에 가보았더니 30년 되었다는 아파트는 어찌나 낡았던지 서울에서 철거직전의 송파구 잠실 3단지보다 10배는 남루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내 집이라고 ‘생각보다 넓네.’ ‘수납공간도 있잖아.’하면서 기뻐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삿짐을 기다렸습니다. 다음 날 이삿짐을 하루 종일 기다리는데 하필이면 저녁 5시경에 단 두 명이 이번에는 버젯(budget)이라고 쓰인 렌탈 트럭을 몰고 나타났습니다. 짐을 옮기는 것도 하도 느리게 해서 답답한 마음에 저와 친구가 도와주어야만 했고 물론 짐도 제가 풀었습니다. 아무리 계약에 다 해주게 되어있고 돈도 이에 맞춰 주었지만 저녁 5시에 시작된 이사가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팔짱만 끼고 지켜볼 수는 없었습니다.
반파된 가구를 살려내다
가까스로 짐을 다 날랐지만 재조립 불가능처럼 보이는 부서진 가구의 잔해를 보는 마음은 참 심란했습니다. 그 날 저녁은 조립할 기력도 없었고 이 친구들이 조립할 능력도 안되어 보였기에 그냥 짐만 집안으로 들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다음날 배째 사장에게 전화해서 가구는 왜 조립 안 해주느냐고 했더니 이런 저런 헛소리를 하다가 한 명 조립할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어떤 흑인이 왔는데 침대만 가까스로 조립하더니 책상과 책장은 부서져서 못한다고 보험 신청하라고 하면서 그냥 떠났습니다. 다시 배째 사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미국에 흔한 이삿짐보관업체 source;ssselect.au
이젠 보험금 신청서 보내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과정에 부서진 물건을 변상 받는 보험인데 업체 측에서 신청서를 제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청서(claim form)를 보내라고는 했지만 부서진 가구를 어찌할까 다시 구입하면 또 다시 조립해야 하는데(미국은 싼 가구는 다 부품을 사서 조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어찌 다할까 걱정하다가 결국 부서진 잔해를 얼기설기 맞추고 못질을 해가면서 책상과 책장을 만들어냈습니다. 배째 사장은 결국 보험 신청서를 보낸다고 말로만 하고 보내지도 않았고 몇 번 전화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이사해서 이 집에서 3년을 살고 있습니다. 저도 성질이 좀 집요했다면 이 악독한 이삿짐하청업체 사장에게 끝까지 변상을 받았어야 했고 이 무책임한 원청업체에도 항의 편지라도 썼어야 했는데 병원 일에 새로 적응하는 것도 힘들고 더 이상 맘 고생하기 싫어서 그냥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미국에서 저의 첫 이사, 악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험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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